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81세의 나이로 사거했다
다시 한 번 패션계의 큰 별이 졌다
영국 패션계의 전설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가 돌아가셨다. 가족들과 함께 평안한 마지막을 맞이하셨다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축복이라면 축복일수도 있겠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Vivienne Westwood)
사실 아주 어린 친구들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에 대해 잘 모를수도 있겠다. 요즘에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로 중국에서의 유행이 역으로 유입되면서 왕왕 눈에 띄는것 같기도 하고 뭐 알기는 알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감흥이 오는 디자이너나 브랜드는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반 백년 가까이 디자인 활동을 해왔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유행은 20세기 중후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런웨이에서 목격되는 찢어진 티셔츠와 진, 플랫폼을 얹은 샌들과 힐 모두 사실 그녀의 오리지널 디자인이라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다. 그녀는 이렇게 라프 시몬스나 레이 가와쿠보처럼 대중을 위한 디자이너보단 디자이너들을 위한 디자이너에 가까웠고, 하여 그녀의 디자인은 아직까지도 비비안 웨스트우드 라벨에 서너배가 넘는 가격으로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계승되고 있다. 참 재밌는 세상이다.
그녀의 디자인 커리어는 그녀의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모두 알다시피 20세기 세계의 구심점에 있던 영국은 점점 그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영국이지만 그로 인해 졸부가 된 석탄 재벌들은 영국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며, 빈부격차는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고 이는 사회의 불평등을 야기하며 그로 인한 불만은 영국을 붕괴시키게 충분했다. 그리하여 대중은 재벌과 정치에 반발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때와는 달리 몇 개의 큰 전쟁을 거친 영국의 사회 지도부에겐 총이 쥐어져 있었고, 대중은 19세기 프랑스 국민들처럼 쟁기를 쥐고 그들에게 달려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발을 동동구르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때, 그들을 대변하기 위해 나타난 것은 음악이었다. 음악은 차마 목소리를 낼 수 없던 대중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었고 그것은 음악 이상의 가치를 대중에게 전달했다.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번지며 시대의 아이콘이 된 펑크. 그리고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그들을 위한 의상을 만들었고 그것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번지게 된다. 찢어진 옷들과 과한 악세서리와 신발들 그녀의 아주 조악하고 파괴적인 디자인들은 영국 내에서 유행을 하게 되었고 이를 보고 영감을 얻은 영국의 후 세대의 디자이너들은 그것을 유럽의 고급 라벨에 접목시키며 그녀의 스타일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업가들이 그렇듯 무리한 확장을 하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모든 패션 브랜드들이 그랬듯 라이센스를 남발하게 되며 우리의 관심과 트렌드에서 멀어져가게 되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어떤 것을 생각하며 이 글을 조회하게 되신지는 내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다. 망한 브랜드의 최후? 늙은 디자이너의 죽음? 어쩌면 그저 가십일수도 셋 다 이실수도 있겠다. 확실히 망했고, 확실히 자극적인 소식이다. 다만, 그녀의 디자인과 스타일은 후 세대에 의해 계속해서 계승될 것이라는 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후에 사람들은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어떻게 기억할까? 나는 그녀처럼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을까? 올 해의 끝자락에서 나에게 나와 1도 관계가 없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여사의 소식은 안타까움보다는 새로운 한 해를 다짐하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 글은 사무실에서 농떙이를 치며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