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8. 13:42ㆍ이슈
패션은 예술인가요?
참 오래되고 지긋지긋한 명제가 하나 있다. 대중문화는 상품일까, 예술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이라는 것은 미술, 음악, 연극 등에 한정된 아주 창의적이고 아주 아주 고루한 활동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때는 2014년, 이런 정론에 반대하는 영화가 등장했다. 대중문화로 멸시되었던 영화를 예술에 반열에 올린 작품의 이름은 버드맨, 레이저를 푱푱쏘며 건물을 날려버리는 예고편에 속은 많은 관객들은 버드맨을 악평했지만, 영화는 한 해를 장식하는 최고의 영화에 선정되며 현대의 클래식에 반열에 올라가게 된다.
사람들은 버드맨에게 물었다. 영화는 상품인가요 예술인가요?
버드맨은 답했다. 예술이 뭔데 씹덕아
그리고 시간은 흘러 2023년, 다음 겨울을 위한 준비가 한창인 밀라노의 패션위크에서 조나단 앤더슨은 버드맨에게 향했던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패션은 예술인가요?
그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패션은 예술일까? JW 앤더슨의 23년 겨울, 밀라노 패션위크와 영화 버드맨
조나단 앤더슨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지루하고 이 글을 읽고 계실분이라면 당연히 알지도, 하지만 모르셔도 전혀 상관없을 그런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조나단 앤더슨,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디자이너고 뭐 천재 디자이너시란다. 브랜드를 만들자마자 대박을 쳤고 LVMH에 있는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 오래된 디자이너 레이블을 다시 살려냈다. 여기까진 평이한 한 천재의 무결한 성공 스토리이다.
보헤미안과 집시의 자유로운 감성을 표방하던 로에베의 조나단 앤더슨. 하지만 너무 과도하게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나머지 옷이 점점 짧아지다못해 결국엔 안입는 지경에까지 이르며 노골적으로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는 그의 디자인 제품들은 외면받기 시작했다.
주로 남성을 벗기는 이 변태 천재 아저씨는 모든 이 시대의 유명 남성 패션 디자이너들이 그렇듯 게이이다. 하지만 자신이 단순히 게이라는 사실에 남성들을 이유없이 벗기고 (이유가 있다해도 달라지진 않는다.), 불특정한 대중을 위한 상품에 성적인 이미지를 여과없이 노출하는 것은 프로라고 볼 수 없는 행태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한다.
게이와 퀴어 문화는 수 천년간의 정치·사회·문화적인 모든 이슈를 대변한다. 에이즈, 결혼, 종교 그리고 모든 사회를 뒤바꾼 그 중심에는 게이 문화가 있었으며, 조나단 앤더슨에서의 작업은 시대를 관통했던 퀴어 문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문화를 만드는 것에 헌신하고자 한다.
뭐래는거야
어쨌건, 자신 딴에는 합리적인 (존나 비합리적인) 이유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그의 말들에는 그가 자신이 만드는 상품이 단순히 상품을 넘어 어떠한 썸팅 스페셜한 문화를 만드는 오브제이자 예술로 자찬 (나아가고자)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그의 상품들은 그의 말마따나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그의 새로운 컬렉션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JW ANDERSON MENS, 23FW
그의 모든 남성복 컬렉션이 그렇듯 퍼스트룩은 벗은 남성이 등장했다. 빼빼마른 모델이 빤스 한장과 부츠를 신고 등장한 시작은 그의 왜곡된 취향을 의심케하기에 충분했다.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보자면 이번 컬렉션 전 선공개되어 실제로 많은 관심을 받기도 하였던 메인 상품인 부츠의 디자인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수도 있겠다. 뭐 하지만 뭐로보나 조나단 앤더슨이 변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제품들은 여성복에서 넘어온듯한 긴 기장의 탑과 필로우인지 토트백인지 뭐를 베개. 탑과는 결합되어있는건지 어쩐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디자인에 다리에는 페인팅을 그리셨다. 문학이나 미술에서 과일이 성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메타포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나는 조나단 앤더슨의 팬으로써, 그가 그렇게 단순하지않은 사람이라고 믿고싶기 때문에 단지 토마토를 먹고 싶어서 그렸다고 생각하련다!!
다음은 드디어 옷같은 옷이 나온다. 오랫동안 조나단 앤더슨의 라벨에서는 길었던 코로나와 맞물려 스웻셔츠라던가 플리스라던가하는 주로 캐주얼한 의류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다시 문밖으로 나섰으니 마냥 잠옷만 만들수는 없는 일. 다음 겨울 시즌 의류에서는 가죽부터 시작해 긴 기장의 아우터들이 등장했다. 투박하고 여유로운 실루엣에 넉넉한 플랩까지 다양한 밀리터리 요소들을 차용한 아우터들은 단순히 캐주얼 웨어로 그쳤던 조나단 앤더슨의 옷장을 더욱 다채롭게 채워준다. 물론, 모르겠다 한 사백에서 오백만원은 될법한 가죽 코트를 연말에 2,000%의 보너스를 받지 않는다면 굳이 조나단 앤더슨에서 구입하진 않겠다만, 어쨌건 이쁘긴하다!
이번 겨울 시즌에도 출시되었던 깊게 파인 라벨의 롱코트는 다음 시즌에도 등장한다. 다음 겨울에도 롱코트의 유행은 이어가게 될까? 어찌 될지는 몰라도 어쨌건 조나단 앤더슨의 겨울 옷장에서는 다시 한번 등장한다.
전반적으로 모든 의상들은 그가 디자인했던 로에베 등에서의 요소들이 많이 차용되었다. 루이비통의 버질 아블로가 연차를 쌓아가며 스트리트 웨어로 시작한 그의 오프 화이트 라벨이 테일러로 돌아섰듯, 조나단 앤더슨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삐에로 코스튬과 같던 그의 디자인들은 점점 더 고급스러운 형태의 의류들로 거듭나는 모습이다.
다음은 트롱프뢰유 티셔츠. 로에베 등에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는 이 트롱프뢰유 티셔츠는 전혀 감각적이지 않은 아주 노골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 트롱프뢰유는 회화에서 차용되는 기법으로 기본적으로 착시와 같은 눈속임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로에베나 이번 시즌 조나단 앤더슨에서 보여주고 있는 트롱프뢰유 프린팅은 왜곡된 비율로 좋게 말해도 착시의 여지가 1도 없는 노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패션은 예술이 아니다. 그가 컬렉션에 내보인 티셔츠는 180유로정도 될법한 비싼 티셔츠일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조나단 앤더슨은 그가 그린 트롱프뢰유에서 미적인 황금비를 찾을 이유도,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이며 의미있는 그 무언가를 투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점에서 그의 작업물들은 제품에서 작품으로 진보된다.
이 노골적으로 벗은 남성들의 사진들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실 수 있을까? 어쩌면 불쾌감일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세상에 내보일 수 없는 자유로움과 일탈에 대한 해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가 늘 말하는대로 전통적인 남성성의 해체라고도 그리고 단지 그저 티셔츠를 티셔츠로 본다해도 무방하다. 여기에 정답은 없다. 이 티셔츠는 아무 의미가 없을수도 있고 어떤 의미도 될 수 있으며, 그 무엇도 여러분의 상상을 제약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돌아가 버드맨의 이야기를 해보자. 젊은 시절 버드맨 (배트맨)을 연기했던 노년의 마이클 키튼을 진정한 배우로써 인정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배우였지만 누구도 그를 배우로써 인정해주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진정한 배우가 되기를 갈망하며 브로드웨이에 입성한다. 하지만 모든 영화와 삶이 그렇듯 그 모든 것들은 그를 방해했고, 스트레스에 폭발해버린 그는 연극에서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선택을 한다. 이후, 전혀 의도하지 않은 그의 히스테릭한 퍼포먼스는 예술이 되었고, 그는 그렇게 꿈에 그리던 진정한 배우가 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지 않았을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요약해봤지만 잘 이해가 되실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여러분은 버드맨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끼실 수 있을까. 여러분은 어벤져스에서 아이언맨이 죽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셨을까? (나는 어벤져스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스포가 아니다.)
조나단 앤더슨의 제품과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어떤 것도 느끼실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느끼지 않으셔도 상관없다. 나는 버드맨을 보고, 상품과 예술을 가르는 그 견고했던 벽은 사실 아주 얇은 막에 불과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글을 쓰는 작법에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가 하나있다. 그것은 글은, 쓰는 작가가 아닌 읽는 사람이 주체라는 것이며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조나단 앤더슨이건, 버드맨이건 아이언맨이건 여러분은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이 모든 것을 예술이라고 말할 것이며, 어떤 이는 이를 예술에 미치지 않는 천박한 상품으로 보실수도 있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아주 오래된 작법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양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음에 그 모든 것은 예술이라고 통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나단 앤더슨이 벗은 남자를 내보이는 것엔 그의 취향 외에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폭발한 마이클 키튼이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날려버린것이 예술이 되었듯, 빼빼마른 남성을 의미없이 벗기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던지는 것 또한 예술이 될 여지는 있다.
하여,
조나단 앤더슨의 새로운 컬렉션에서 떠 오르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조나단 앤더슨의 제품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패션은 과연 예술일까 상품일까?
조나단 앤더슨에게 아무리 물어봐야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아닌 여러분이 답 해야할 질문이기 때문이다.